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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KMQ포럼 개요와 취지
포럼에 임하며

 

 성남용
한국선교KMQ 편집인

 

종교개혁 500주년이다. 진원지인 유럽은 말할 것도 없고, 전 세계적으로 종교개혁에 대한 논의와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한국 교회와 선교계도 예외가 아니다. 아니 더 간절하게 개혁을 논하고 있다. 엄중한 선교적 현실 앞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한국 선교 KMQ도 3년째 ‘선교와 패러다임’이라는 주제로 포럼을 열고 있다. 지난 2년 동안 동일한 주제로 한국 교회의 선교 패러다임에 대한 진단과 전망(2015년), 그리고 교회 선교지 선교사(2016년)를 다루었다. 올해도 같은 주제로 종교개혁 500주년을 함께 논의하려 한다. 참여자 한 분 한 분이 함께 참여하는 공동 포럼이 되길 기대한다. 함께 뜻을 공유하고, 함께 고민하며, 함께 풀어야 할 과제가 많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이 일어날 당시의 교회는 일촉즉발의 위기에 놓여 있었다. 호수에 물이 가득 차 댐이 넘치기 일보 직전인데, 거기에 거센 폭풍우까지 몰아치는 댐 앞의 집 같은 모습이었다. 당시의 교회를 대략 다섯 개의 모습으로 설명할 수 있다.  

 

1) 탐욕적인 교회. 교회는 힘이 있었다. 재물도 많았다. 그러니까 정치 군사적 권력, 사회 문화적 영향력, 물질적 재화를 모두 가지고 있었다. 이것들을 놓고 세속 군주와 경쟁할 정도였다. 그러니까 교회는 예수님이 거부하셨던 돈, 영향력, 권력을 모두 소유했었다(눅4:3-12). 성직은 세속 권력을 얻는 첩경으로 여겨져 매매의 대상이 되었다. 식자들은 이런 교회와 사제들의 행태를 경멸했다. 단테의 신곡 천국 편 27곡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계신 그 앞에 비어있는 나의 그 자리, 나의 그 자리, 나의 그 자리를 세상에서 더럽히는 자가 나의 무덤이 놓인 곳을 피와 악취의 시궁창으로 만들었다." 단테가 베드로의 입을 빌려 1300년 당시의 193대 교황 보나파르트 8세에게 퍼부은 경멸의 말이다. 그는 교회가 피와 악취의 시궁창이 되었다며 탄식했다. 움베르토 에코도 ‘장미의 이름’이란 소설을 통해서 14세기 교회를 언급하며 부와 탐욕에 찌든 196대 교황 요한 22세를 조롱했다. 루터 시대의 교황들을 통해서도 당시 교회의 모습을 알 수 있다. 1501년 루터가 대학생이었을 때의 교황은 군주론(마키아벨리)의 모델이었던 체사레 보르자의 친부 알렉산드르 6세였다. 그는 18세의 아들 체사레를 추기경에 임명할 정도로 타락해 있었다. 루터가 종교개혁의 기치를 들었을 때의 교황은 피렌체의 권력자였던 로렌초 데 메디치의 차남 조반니 메디치(레오 10세)였다. 그는 사업가의 자녀답게 면벌부를 판매하여 교회개혁의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다. 당시 만연했던 교회 내의 성직 매매, 부패, 타락상을 엿 볼 수 있다.

 

2) 싸우는 교회. 물론 교회는 영적 전쟁 중에 있다(엡6:11-19). 싸움의 대상은 세상과 사탄의 세력들이다. 하지만 당시 교회는 영적 전쟁이 아닌 세속 권력을 놓고 주변 나라들과 싸웠다. 지금도 이탈리아 피렌체의 시뇨리아 광장에 가보면, 남쪽의 로마 교황청을 노려보고 있는 미켈란젤로의 다윗 상(1501-1504), 반디넬리의 허큘리스 상(1533), 암만나티의 넵튠 상(1565) 등을 볼 수 있다. 교황청을 향한 피렌체인들의 적개심이 들어있다. 교회의 사제들은 교권을 차지하기 위해서도 싸웠다. 그래서 자주 대립 교황들이 있었고, 1409년에는 세 명의 교황이 등장하기도 했다.

 

3) 섬처럼 고립된 교회. 교회는 성도들의 삶에 무관한 섬처럼 존재했고, 사제들은 성도들과 삶을 나누지 못했다. 서로 계급이 달랐고, 관심사도 달랐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이며,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엡1:22-23). 목회자를 포함한 모든 성도들은 모두 한 몸의 지체들이다(엡5:30). 그러므로 서로 연결되어 그리스도의 몸을 자라게 해야 한다(엡4:16). 하지만 당시 교회는 이렇게 서로 연결되어 있지 못했다. 교회가 성도들의 삶과 무관한 수도원(monastery)처럼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교회와 사제들은 자신들의 일에 분주하여 성도들의 삶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에 대한 답을 찾는 일에 무관심했다고 할 수 있다.

 

4) 지배하는 교회. 사제는 성도들의 삶을 이끄는 지도자라기보다는 군림하는 지배자였다. 성도들은 목양의 대상이 아니라 권징의 대상에 불과했다. 당시 교회가 행했던 종교 재판소, 고해성사, 성찬 예식, 권징 등을 보면 지배하는 교회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런 제도들을 통해서 교회는 성도들의 삶을 부당하게 지배했다. 그러니까 교회는 성도들이 두려워하며 우러러보는 성소였지, 함께 교제하고 예배드리는 하나님의 집이 아니었다.

 

5) 성경의 가르침을 잃어버린 교회. 사제들부터 성경을 몰랐다. 물론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종교개혁 당시 독일인의 90% 이상이 문맹이었다는 확인되지 않은 통계가 있다. 루터가 루카스 크라나흐를 통해서 자신의 설교를 그림으로 표현하게 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 또한 인쇄술이 없었기 때문에 사제들도 성경을 소유할 수 없었다. 그러니 성도들은 말할 것도 없다. 성경을 몰랐기 때문에 교회는 전통과 관습에 매달렸고, 미신적 형태의 신앙생활도 피하지 못했다.

 

그런데 루터가 교회 개혁의 기치를 들기 전부터 교회의 개혁을 주장하던 사람들이 많았다. 프랑스 리옹(Lyons)의 피터 왈도(1140-1205), 영국의 존 위클리프(1330-1384), 체코의 얀 후스(1369-1415), 피렌체의 지롤라모 사보나롤라(1452-1498) 등이 대표적인 개혁가들이다. 물론 이들의 개혁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용기 있는 소수였다. 살아있는 권력에 항거하여 홀로 ‘아니오’를 외칠 수 있었던 순교자들이었다. 믿음으로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했던 모세를 닮은 믿음의 사람들이었다(히11:24). 그들은 온갖 형태의 핍박을 당했다. 왈도는 이단으로 규정되어 추방을 당했고, 후스와 사보나롤라는 화형을 당했다. 이들의 실패가 없었다면 루터의 개혁도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이 들었던 교회 개혁의 기치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공통점들이 있다. 그들 모두 화석화된 교회의 신학에 도전했다는 점이다. 생명력 없이 죽어있는 교조화된 신학을 거부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성경적 기독교로의 회복을 주장했다.


그렇다면 오늘의 교회는 어떠한가? 외적 환경은 많이 달라졌다. 교회는 기독교 왕국적 환경에 놓여있지 않다. 정치 군사적 권력도 없다. 성도들의 삶을 지배하지도 않는다. 문맹자도 거의 없다. 오히려 정보의 홍수 시대를 살고 있다. 하지만 오늘의 교회도 500년 전 교회를 닮았다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다. 화려한 예배당과 큰 영향력, 지도자들의 탐욕과 명예욕, 교권 다툼과 교회 내의 비성경적 관습 등이 주로 지적된다. 위기를 말하며 교회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하지만 실망하며 비판하다가 곧 침묵한다.

침묵하는 이유가 크게 두 가지다. 1) 개혁을 위해 기치를 들 정도의 용기가 없다. 미움 받을 용기가 없는 것이다. 2) 현실에 너무 익숙해져서 자신이 문제의 일부가 되어 있다. 선교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선교의 패러다임을 논하지만 여전히 예전의 방식을 답습하고 있다. 일방주의적 선교는 선교 현실과 신학의 이름으로 무시된다. 물질주의적 선교는 실용주의적 판단으로 용납한다. 그래서 군림하고 지배하는 식민주의적 선교 형태가 사라지지 않는다. 예수님의 뜻을 따르기보다 돌을 빵으로 만들어서라도 빵을 나눠주는 시혜성 선교도 계속되고 있다. 이제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성경이 가르치는 곳까지 가고, 멈추는 곳에서 멈춰야 한다. 하나님만을 영화롭게 하는 교회와 선교가 되게 해야 한다. 그러려면 무엇을 하든지 예수님처럼만 하면 된다.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셨다(요17:4).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서 성부 하나님이 칭송을 받으셨다는 뜻이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우리의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께서 하라고 주신 일들만 하고(요17:4), 사람들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하면 된다(요8:28, 요12:50). 그런데 지금 한국교회와 선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다.

 

오늘 발제될 6개의 글들에 12개의 논찬이 있다. 이를 토대로 활발한 토론이 있길 기대한다. 우리는 모두 세계 선교를 향해 항해하는 배를 띄우는 일에 참여한 사람들이다. 일부는 육지에 있고, 일부는 배에 타고 있다. 그런데 육지에는 자주 지진이 일어나고, 바다에는 거친 풍랑이 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고 있든지, 잠깐이라도 한 눈을 팔면 배가 전복될 수도 있다. 그러니까 한국 교회와 한국 선교는 모두 위기에 처해 있다. 이 위기를 통해서 뒷걸음질 칠 수도 있고 더 빨리 나갈 수도 있다. 물론 더 빨리 갈 수 있게 하는 것이 우리의 책무다. 이번 포럼을 통해서 더 좋은 교회, 더 좋은 선교를 위한 청사진이 그려질 수 있기를 바란다. 


▶ 성남용 목사는 KMQ 편집인으로 나이지리아 선교사로 사역한 바 있고 현재 삼광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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